"현장에 들어서자 매케한 연기가 훅 치고 들어왔어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죠. 불길에 뭔가 타는 소리, 거친 내 숨소리만 귓전을 어지럽게 때렸습니다. 손에 든 랜턴에 온 신경을 집중했어요. '화점'을 찾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화재 현장에선 불이 시작된 화점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화점을 찾아야 불길을 빨리 잡을 수 있어요. 순간 열기와 빛이 유난히 뿜어져 나오는 지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화점이었죠.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충청북도 보은소방서 119안전센터에서 근무하는 소방관 이민영(34)씨. 그는 충북 최초의 여성인명구조사다.
청주동부소방서에서 화재진압대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그는 2017년 투입됐던 화재현장이 늘 기억에 남는다. 학교도서관에 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민영씨는 현장에 두세 곳의 센터에서 소방차가 속속 도착하자 앞뒤 재지 않고 바로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현장에서 새내기 소방관이었던 민영씨는 그날 화점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전공'을 세웠다. 화재를 진압한 뒤 다른 센터의 팀장들로부터 "나중에 꼭 같이 근무하자"는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뿌듯했다"고 기억했다.
지난달 12일 그늘 한 점 없이 맑았던 날 그를 만났다. 전날에도 밤샘 근무를 했던 민영씨는 인터뷰 당일 오전까지 근무를 하고 소방서 내에서 쪽잠을 자다 취재진에게 시간을 냈다.
남자도 어렵다는 인명구조사
민영씨는 올해 인명구조사 2급 자격을 취득했다. 어떤 재난 위기 상황에서도 생명을 구조 할 수 있는 전문 구조대원의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소방 조직 특성상 여성 소방관에게 현장 근무 기회가 적어 민영씨는 화재, 구급 등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재 진압 대원 1년 5개월 근무 후 2년 간 행정업무를 했어요. 저는 현장에 더 있고 싶었지만, 소방에 와보니 여성은 현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제한 되는 거에요. 저도 처음 들어왔을 때 몇 달이 되지 않았는데 "너 행정업무 안가냐"는 말을 계속 들었어요. 선배들은 저에게 여직원이니 내근하는게 더 좋다고 계속 얘기했지만, 저는 젊을 때는 현장을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장 활동을 하는 소방관이 되려고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 저것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만 여성소방관인 저에게 (현장에 나갈)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중에서도 최근 민영씨가 취득한 인명구조사는 기초체력과 전문 인명구조 기술 등을 복합적으로 평가하는데, 남녀 모두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고 평균 합격률도 35%로 낮은 편이다. 지난해 기준 전국에서 인명구조사 자격을 취득한 소방관은 모두 4331명, 이중 여성 인명구조사는 민영씨를 포함해 10명도 채 되지 않아 의미가 크다.
현재 민영씨가 있는 충북 보은소방서는 사건 사고가 많은 편은 아니라고 했다. 화재 현장을 다니던 첫 근무지와 달리 보은은 대형 사고가 많지 않아 조용한 편이다. 그럼에도 소방차 정비, 소방호스 확인 등은 언제든 사고에 대처할 수 있게 긴장을 끈을 놓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점검한다고 설명했다.
천안함 만행 보고 해군 자원 입대
민영씨는 해군 대위 출신이다. 하얀색 해군 제복도, 주황색 소방관 기동복도 잘 어울리는 민영씨에게 원래 꿈이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느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에서 전공이 국제경영학이었어요. 부전공은 패션디자인을 전공해서 의류 마케팅 분야로 취업하는 것이 원래 대학 때 꿈이었어요. 사실 체력도 좋은 편은 아니어서 친구들은 놀라기도 해요."
민영씨는 2010년 천안함 사건과 북의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을 보고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4년간 군에서 나라를 위해 살던 그는 다시 한 번 국가와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소방관이라는 진로를 택했다. 전역 후 2016년 소방관 시험에 합격한 민영씨는 2017년 2월 소방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군 전역 후 큰 목표 없이 전역을 앞두고 있었는데, TV에서 소방학교 신임교육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나오는 거에요. 그걸 보면서 내가 하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편견을 깨려는 여성 소방공무원
민영씨에게 남성 인력이 다수인 소방 조직에서 소수인 여성 소방공무원의 어려움도 물었다. 그는 소방 조직이 여성 소방공무원에게 '원치 않는 매너'를 보일 때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낀다고 했다.
"소방에 와보니 다들 매너가 좋으신거에요. 제가 체격도 되고 힘도 되고, 군대도 갔다 왔다고 해도 무거운 것을 들려고 하면 난리가 날 정도에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남자 동료끼리만) '너랑 너, 와봐' 해서 모아서 가요. 저도 (그 일을) 할 수 있거든요"
민영씨는 같은 동료로 인정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성 소방관이라고 해서 특별히 우대해주고 '배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소방관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똑같이 기회를 줬으면 한다는거다.
"과거에는 여성 화재대원을 1년에 한 명 뽑을까 말까 했어요. 제가 들어올 때는 그나마 두 명을 뽑았고 점차 (여성 소방관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힘이 세고 억센 남자분들 사이에서 여자 분들은 그동안 소중한 분들이었던 거에요. 이제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 여성 소방관들이 들어오고 있어요. 소수였던 여성들이 소방조직에 늘어나면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잘 하고 (현장에서) 더 활약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민영씨는 여성 소방관들은 내근을 원하고 힘이 약할 것이라는 편견이 하루 빨리 사라지면 좋겠다고 했다. 또 동료 소방관들도 여성 소방관들을 응원해주길 기대했다. 수시로 마주하게 되는 반복된 현실의 먹먹함을 극복하기 위해 민영씨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민영씨는 업무 특성상 체력적인 요소가 많이 차지하는 만큼 쉬는 날에는 달리기, 수영, 백패킹 등을 하며 체력과 힘을 키우고 있다.
소방청 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2020년 기준 소방공무원은 총 6만 994명으로 여성 소방공무원은 5649명으로 9.3%다. 전년 대비 6.1%(350명) 증가했다.
소방관은 임용 시 소방(화재)·구조·구급 세 분야로 채용한다. 민영씨는 소방대원으로 임용돼 화재 진압반에서 일을 하다 2년 정도 내근을 했다. 행정 업무를 하던 그 시기가 무엇인가를 더 해야만 하겠다는 욕구가 '폭발'했었다고 했다. 여성 소방공무원은 임용 후 출동 업무를 하다 자연스럽게 내근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현장에 맞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대로면 나는 그냥 내근 업무만 하다가 나이를 먹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난 이렇게 기운이 넘치는데,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봐 주실까 싶어서 여러 자격증들을 더 열심히 준비했던 거 같아요."
유능한 소방관으로 성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민영씨지만 3년차 '선배'가 되면서는 변화가 생겼다. 하나 둘 늘어가는 후배들 수만큼 덩달아 책임감도 두 어깨에 올려진 것이다.
"막내일 때는 '불나방' 같아서 현장에 가면 무조건 그냥 달려가고 그랬어요. 저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제가 운전하는 소방차에 후배들이 타요. 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후배들과 무사히 복귀를 해야 되어서 늘 안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도 물었다.
"사회나 남들이 정하는 기준에 맞춰서 한계를 정하지 않고 도전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니가 무슨 인명구조사야'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제가 준비하는 것을 보고 많은 분들이 여자들은 못해, 여자가 어떻게 해 하고 말씀하셨던 분들도 많았는데, 주변을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여성 소방관 분들도 많아요. 하지만 남들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 같아요. 하고 싶고 정말 목표가 있으시면 그냥 도전해서 이뤄냈으면 좋겠어요."
소방관 이민영의 도전은 'ing'
민영씨는 아직도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다양한 현장과 위험에 처한 시민들에게 더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려면 자신의 지식이 더 두터워져야했다. 그렇게 화재대응능력 2급, 응급구조사 2급, 드론자격증, 인명구조사 2급 등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 올해는 예방 분야의 소방안전교육사 2차 시험을 앞두고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소방관도 현장에 나가 시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제가 적절한 (구조)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화재·구급·예방 등 어느 분야든지 제가 어느 정도는 판단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으려고 해요. 그래서 지금 이것저것 다 도전하면서 능력을 나름 키워가고 있습니다. 공부를 더 해보고 기회가 되면 구조대 근무도 해보고 싶어요. 나중에 경험이 많이 차면 구조대장까지 해보고 싶어요."
출처 : 팩트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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